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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의 고민 #17 - 왜 고민이 생기면 뛰러 나가게 될까?

인생이라는 게 가벼운 고민거리만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끔 아무리 고민해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머물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안 좋은 방향으로만 향하고, 마음은 더 괴로워집니다.

이럴 때마다 가끔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수십 번 반복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저에게 겹쳐 보입니다.

다행히 아이들한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와이프는, 티 내지 않으려 해도 다 압니다.

그리고 와이프는 제가 부담을 느낄까 봐, 알면서도 애써 모른척 합니다.

근데 저는 또, 그 모른척하는 와이프가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그 불안을 어찌하지 못하는 저!!

결국, 잠깐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저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럴 때 와이프한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와이프 또한 항상 "그래"라고 합니다.

"나 좀 뛰고 올게, 좀 많이 걸릴 수 있어"

건강으로 시작했던 달리기가 체력에 욕심이 생겨 마라톤이 되고, 가끔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괴로운 마음에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아마 저처럼,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면서 생각을 정리해 본 러너들도 있을 겁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가만히 앉아서 고민할 때는 계속 괴로움으로 빠지는데,
뛰면서 그 생각을 하면 그나마 조금씩 나아질까?
· · ·
I. 앉아 있으면,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심리학자 수잔 놀렌-혹스마가 수십 년간 연구한 게 있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생각할 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게 받지만, 실제로는 그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만 커질 뿐, 정작 효과적인 행동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같은 장면을 마흔 번 재생해도, 다섯 번째 재생과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새로운 정보도, 결정도, 계획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기분만 더 나빠지고, 생각의 홈만 깊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반추(rumination), 조금 더 넓게는 반복적 부정적 사고(RNT)라고 부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그랬던 거 같습니다.

같은 걱정을, 같은 말로, 몇십 번씩 반복하셨습니다.

그 반복이 무언가를 해결해준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집안의 공기를 계속 무겁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II. 뛰면, 생각이 문제 주위를 돕니다

근데 뛰기 시작하면, 같은 고민인데도 흘러가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진짜 내가 힘든 이유가 뭘까?'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없앨 수 없는, 내 성향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는 게 아닙니다.

문제를 반복해서 보는 것에서, 문제의 구조를 나눠서 보는 것으로 넘어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2014년 스탠퍼드 연구팀(Oppezzo & Schwartz)이 이 부분을 실험으로 확인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와 걸을 때의 사고를 비교했더니, 걷는 동안 새로운 아이디어를 여러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능력(발산적 사고)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 효과는 걷기를 멈춘 뒤에도 어느 정도 이어졌습니다.

다만 정답 하나를 딱 찾아내는 사고(수렴적 사고)에서는 효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뛰면서 붙잡고 있는 고민들이 딱 그런 종류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까.'
'내가 왜 이렇게 힘든가.'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나.'

정답 하나를 계산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넓게 훑어보는 문제.

적어도 여러 가능성을 넓게 살펴봐야 하는 고민에서는, 움직임이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III. 왜 그럴까

여기서부터는 몇 가지가 같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뛰면 생각을 100% 붙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앉아 있으면 모든 정신적 자원을 그 고민 하나에 쏟아부을 수 있습니다.

근데 달리면 호흡, 페이스, 발 딛는 자리, 주변 상황까지 동시에 처리해야 합니다.

고민을 계속하면서도, 일부 주의는 몸과 환경으로 흩어집니다.

그 틈에서, 같은 생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여유가 생깁니다.

 

둘째, 생각의 질문이 바뀝니다.

앉아 있을 때의 질문은 대개 과거와 미래를 향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지?'
'내가 뭘 잘못했지?'
'앞으로 어떻게 되지?'

그런데 뛰면서는 이상하게 현재로 돌아오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힘든 이유가 정확히 뭘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같은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만, 질문이 바뀌는 순간 생각의 방향도 바뀝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꽤 큽니다.

앞의 질문은 답을 찾지 못하면 계속 반복됩니다. 반면 뒤의 질문은 결국 선택지를 만들게 됩니다.

 

셋째, 환경도 생각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2015년 한 연구에서는 자연 속을 90분 걸은 사람과 도심을 90분 걸은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자연 속을 걸은 그룹에서는 반추가 줄었고, 반추와 관련된 뇌 영역의 활동 변화도 관찰됐습니다.

같은 시간 동안 걸었다고 모두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뛰면서 생각이 달라지는 데는 '달리는 행위'뿐 아니라, 집과 다른 공간으로 나가 길을 따라 움직이는 환경 자체도 영향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넷째, 꾸준히 뛰면 반추 자체가 줄어든다는 근거도 있습니다.

2025년에 나온 체계적 문헌고찰(19개 연구 종합)에서는, 신체활동이 반복적 부정적 사고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만 단발성 운동은 효과가 제한적이었고, 중~고강도로 30~60분씩, 주 3~5회 이상 꾸준히 했을 때 효과가 가장 뚜렷했습니다.

즉, 오늘 한 번 뛰어서 그날의 고민이 정리되는 것과, 몇 년째 계속 뛰어온 사람이 원래 반추 자체를 덜 하게 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아마 저는 둘 다 조금씩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IV. 그래서, 저는 뛰러 갑니다

앉아 있을 때는 생각이 이렇게 흐릅니다.

문제 → 감정 → 문제 → 감정 → 문제.

뛸 때는 이렇게 흐릅니다.

문제 → 원인 → 왜? → 조건 → 선택지 → 감수할 것 → 결론.

가만히 앉아 고민할 때는 문제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고,
뛰면서 고민할 때는 문제 주위를 돌며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뛰고 나면, 늘 "문제가 해결됐다"는 아닙니다.

"아, 내가 왜 이게 힘들었는지 알겠다"는 정도입니다.

근데 어려운 고민 앞에서는, 보통 해결책보다 이게 먼저 필요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어쩌면 그랬을 겁니다.

해결책이 없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해야 이 괴로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몰랐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정말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몇 번 겪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네요.

생각이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아버지의 괴로움을.

그리고 어쩌면,
그때의 아버지가 얼마나 괴로웠을지를.
"나 좀 뛰고 올게, 좀 많이 걸릴 수 있어."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

고민을 잊으러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같은 생각 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저를, 조금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이 말이,
제가 아버지와 다르게 살아보려는
가장 조용한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한 연구: Nolen-Hoeksema, S. (반추 이론) · Oppezzo, M., & Schwartz, D. L. (2014). Give your ideas some legs: The positive effect of walking on creative thinking.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Learning, Memory, and Cognition, 40(4), 1142–1152. · Bratman, G. N. et al. (2015). Nature experience reduces rumination and subgenual prefrontal cortex activation. PNAS, 112(28), 8567–8572. · Wang, S., Lu, M., Dong, X., & Xu, Y. (2025). Does physical activity-based intervention decrease repetitive negative thinking? A systematic review. PLOS ONE, 20(4), e0319806.